칼 럼

삶은 전쟁의 연속 - 김대환 칼럼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8.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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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전쟁의 연속 - 김대환

                        광기는 인간의 심성 불지르고 고착

 

진흙더미의 뻘속에 뿌리를 박고 그의 연한 몸은 대궁을 키워 올려 연꽃을 피워낸다. 세상을 보는 천차만별의 시각속에 정치도 경제도 나라안팎은 언제나 총칼만 보이지 않았지 삶이 곧 다툼의 필연적인 것 같은 전쟁의 연속이다.
평화와 인권의 선도국이며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지구에서 가장 평화스러운 나라 노르웨이(인구 468만명) 수도 오슬로를 하루 아침에 폭탄과 무차별 총격으로 76명의 목숨을 앗아간 침묵과 슬픔의 도시로 가라앉혔다.


범인은 32세의 자국인으로 자기 도취에 빠진 애국자, 보수적 기독교 근본주의자이며 극우 민족주의와 문화적 순혈주의를 신봉한 또라이였다. 또라이가 토해낸 광기(狂氣)는 인간의 유전자 속에 숨어 있는 전혀 새로운 염색체가 아닌 평범한 시민의 피속에 흐른 광기의 살인마였다.
광기의 범죄는 자기 주관이 최고조에 달하며 자기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휘두르는 광적인 힘이다. 요즘은 사회적 시설과 의료의 발달로 정신적 분열증이 있는 사람은 시설이나 요양원에서 치료와 휴식을 병행하면서 광기를 억제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기가 있는 사람은 힘이 장사다 하여 이웃이나 친척들중에 힘센 사람이 겁을 주거나 직계 가족들이 감금시키거나 밥을 적게 주고 굶기는 사례가 있었다.
광기는 인간의 심성을 불지르고 고착화시킨다. 32세의 노르웨이 젊은이도 전형적인 자기 최면과 도취에 빠진 광인으로 분류하는데 몸 속의 암덩이와 같이 이 광증도 사람에 따라 평소 겉으로 전혀 보이지 않음이 더 무서운 것이다.


종교를 잘못 받아들이면 마약과 같이 헤어날 수 없는 원리주의에 심취되고 이방인 배척심리와 과대망상 및 자기 주관의 확실성과 정치인에 대한 보복심 등등이 비빔되서 사고력 혼전으로 뇌가 흔들린 광기의 대학살 사건은 또 하나의 새로운 병폐의 현대병이다.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에 반대하고 인간의 현실적 삶 자체를 중시한 20세기의 현대 윤리는 실존주의 실용주의 생명존중사상 등을 들 수 있는데 서양 윤리의 특징도 인간 본성과 관련된 측면이라면 이성과 사유를 중시하며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희대의 광란적 살인이 세계의 행복도시의 지붕인 노르웨이에서 자행되었으니 또라이들의 광기가 때와 곳을 가림없이 폭발할 수 있음을 생각하니 삶은 이제 또라이를 피하거나 주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왔다.


9·11테러가 동서의 갈등으로 대별해도 결국 불씨는 종교간 갈등이었다. 성경과 코란은 각각 최고의 성서이다. 충돌하거나 갈등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민족과 민족 대민족과 소수민족이 대를 이어오면서 묵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과대망상인의 눈에 확대되어 어른거리면 자신의 왜소함을 광기로 치환하여 표출하여 폭발시키는 것이다.
국가에 따라서 다행히 종교천국으로 변신한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종교와 연관된 폭력이나 종교간 갈등이 없는 좋은 국가이다.


다종교 다문화를 인정하는 나라라고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으면 될까. 신(神)이 다툼을 조장하여 인간에게 지시하지는 않았다.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작금의 사회상과 컴퓨터가 잉태한 개인주의의 자기 고집과 광신의 종교적 신념과 극단의 인종주의의 회의와 증오감 등등은 예방교육으로는 그 처방이 미미할 뿐이다.


성서, 코란, 불서도 한결같이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역사의 기록도 국사(國史)의 기록도 인간의 손에 의해서 정리되는 것이다.
삶이 왜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연속일까. 개구리야 머리가 나빠 어디로 뛸지 모르지만 무의식 속에 일단 뛰고 본다.
머리 좋은 인간들은 창밖에 내리는 빗물과 가슴속을 적시는 사색의 빗물을 구별하며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행복하고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고등 동물이면서…두둥실 한 조각 흰 구름 떠가며 감자 삶아 먹고 집중호우 조심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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