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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부동산의 대명사 영천공인중개사사무소 이상열 대표 - 아파트는 투자 대상이 아니라 주거 개념으로 소유해야

영천시민신문기자 2021. 7. 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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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부동산의 대명사 영천공인중개사사무소 이상열 대표”

“아파트는 투자 대상이 아니라 주거 개념으로 소유해야”

 

 

 

영천 부동산의 대명사로 알려진 정장 사나이 이상열 대표(65 영천공인중개사사무소, 공인중개사협회 영천시지회장)를 만나 영천 부동산의 역사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부동산 업계의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이상열 대표는 85년도 제1회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뒤 몇 달 후 바로 완산동(신시장)에서 개업했다. 86년 4월경 이다.


개업하자 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지역 부동산 중개 선배들을 찾아가 인사하는 일이었다. 당시 선배들은 공인중개사가 아닌 (복덕방)중개인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중개인 사무소가 25개 정도였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일일이 인사하고 명함을 전달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공인중개사)저거 무엇하는 것이지, 젊은 사람이 할 것이 없나, 밥 먹고 살겠나”하는 걱정 소리만 들리고 공인중개사란 인식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이상열 영천공인중개사대표가 인터뷰하고 있다

 

중개인이 판을 치는 시대라 공인중개사에 와서 주택이나 상가 등을 거래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인중개사 자격이 없던 시절이라 중개인 영업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신고만 하면 할 수 있었으며,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부동산 업무를 하고 매매를 하기도 했다.


개업하고 1년은 완전 파리만 날리는 신세였다. ‘개점휴업’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나름 열심히 뛰었다. 30대 초반에 동분서주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계속 인사하고 명함을 돌리고 다녔다. 왜냐면 시작할 때 여동생과 금융기관에서 약간의 빌린 돈을 갚아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각오로 했는데, 1년이 좀 지나자 1-2건씩 중개가 들어와 매매도 성사시키는 등 사무실에 온기가 돌기시작했다.

당시 평당 거래 가격은 35년 전이라 기억은 없으나 완산동 주택과 상가는 지금처럼 시세가 높았다. 80년대 말 88올림픽이 개최되고 90년대 초 들어서면서 경기 호황으로 부동산 경기도 좋았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질 즈음.

 

2009년 영천중앙로타클럽 회장 이취임식에서 회장으로 취임하는 이상열 대표

 


1991년 지역 후배 장애인 몇몇이 찾아와 영천지역 장애인들의 권익을 대변할 장애인 단체가 꼭 필요하다고 부추기는데 거절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때부터 장애인 단체 결성에 열을 올리며 다녔다.(이 대표는 왼쪽팔 3분2를 26세때 사고로 잃어 장애인이다.)

 

92년경부터는 부동산 중개는 뒤로 밀렸다. 영천시,군지체장애인협회장을 맡았다. 8년간 영천시 장애인 단체를 맡아 활동하고 1999년에 경상북도 지체장애인협회장도 맡았다. 장애인 권익을 대변하러 기관단체를 방문하다 보니 인맥이 넓어져 경상북도장애인총연합회장을 잠시 겸직도 하면서 4년을 경상북도 지체장애인협회장을 맡았다. 당시 이의근 경상북도지사는 “이 회장은 장애인 도지사다.”며 항상 격려했다. 장애인 권익 향상을 위한 정책과 법을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 주차와 스티커부착, 승용차 2천cc까지 인정하는 것 등이다.

 

부동산은 뒷전 이었지만 근근이 사무실은 운영해 나가고 있었으며, 경제력은 계속 적자로 아내 몰래 숨겨둔 비자금을 모두 탕진 한 것이 아직도 아내에게 미안 한 마음이다. 당시는 장애인 단체장을 맡아도 활동비나 판공비 등은 전혀 없었다.
4년간 경북협회장은 맡아 23개 시군을 누비고 다녀보니 경상북도가 진짜 넓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12년간 장애인 권익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가장 보람 있었던 것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영천시장애인복지관을 현 위치(시내 중앙)에 건립한 것이다.

 

고인된 이의근 도지사와 면담하는 이상열 대표


보건복지부 예산을 받아 장애인 복지관을 짓는데, 전국 경쟁률이 매년 치열했다. 2001년 영천시청 이소영 사회복지과장은 행정적으로 장애인들의 업무 지원을 아끼지 않아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표는 중앙에 올라가 장애인협회 중앙회장에 부탁하고 보건복지부를 설득한 끝에 2001년 영천시 장애인 복지관 예산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이 대표는 일등공신으로 이소영 과장님이라고 여러 번 강조해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과 장애인 배려에 감사하는 예를 표하기도 했다.(건립 과정과 예산확보 상세한 이야기는 길어서 생략)


2002년 이후로 다시 부동산으로 돌아와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4년간 거의 일을 안 하다가 하니 2~3년간은 힘들었다.
그 후로 계속 본업에 집중하면서 중개도 하고 투자도 했다. 이 대표가 투자한 부동산은 대부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정적인 수익을 안겨줬다.

별 문제없이 생활하다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찾아왔다.


2016년 아내가 아주 희귀암인 외이도암(선양낭포암)으로 투병을 시작 해 만사를 제쳐두고 남들은 1년에 한 두 번 갈까 한다는 서울을 직접 운전하여 60여회나 뛰어 다녔다. 평소에는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암이란 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지난 연초에는 이제 그만 오시라는 의사 판정을 받고서야 한숨을 돌렸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맘으로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투병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암 투병이라는 큰 상처를 겪으며 내 자신을 뒤 돌아 볼 수 있었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또한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았음에 이제라도 스스로를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꾸짖을 수 있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 한다.

 

지난해 코로나19가 터지자 부동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대표도 어려웠지만 부동산업 자체가 어려워 공인중개사 사무실도 많이 문을 닫았다. 한편으로 개업한 곳도 있지만 내실은 어렵다. 어려운건 다 마찬가지다고 한다.
영천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려면 남들보다 열심히 뛰어야 한다. 영천 부동산은 급격한 변동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회사 다니는것 보다 약간 더 나은 연봉을 받는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방법도 남들보다 열심히 뛰는 것이다. 역발상의 생각도 가지면서.

 

시민신문사 2009년 사랑의 쌀독 행사에 쌀을 기증한 영천중앙로타리클럽회원들과 함께한 모습


그리고 영천이라는 중소도시에서는 아파트나 주택은 투자의 대상이 아니고 그냥 내가 살아가는 내 집이라는 주거의 개념으로 소유하고 부동산을 투자하려면 토지나 상가가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고, 위치는 개인별로 큰 차이가 있겠지만 투자를 하고자 한다면 무허가 또는 유사 부동산업자들의 ‘카더라’식의 무책임한 이야기에 현혹 되지 말고 반드시 부동산 거래의 전문가인 공인중개사와 상담하고 공인중개사를 통해서 해야 안전하다.


영천시 지적정보과에서도 부동산 사무실을 방문 한다면 꼭 공인중개사와 상담을 진행 하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홍보하고 있다.
영천시에는 150여개의 공인중개사사무소가 영업을 하고 있으니 공인중개사들과 친분을 쌓으면 일반인들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상열 대표는 “20대 때 사고로 인해 팔의 일부를 절단했지만 처음엔 망연자실했으나 병원을 나설 때 이제는 몸으로 하는 것 보다 머리로 먹고 사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생활했으며, 비장애인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목표로 매사에 도전해왔다.”면서 “목표가 있었기에 좌절하거나 비관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할 시간이 없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렵지만 목표를 세워 하나씩 실천하면 다 해결된다. 이제는 쉬고 싶기도 하지만 30대 초반 개업당시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만히 잊지를 못한다.“고 해 왕성한 활동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대표는 공인중개사협회 영천시지회장, 지체장애인영천시회장 및 경상북도 지체장애인협회장 외에도 영천중앙로타리클럽회장, 한국리더십센터 영남교육원 전문위원, 경북북부1교도소 교정위원 등 많은 봉사활동 단체를 맡아 봉사활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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