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낙화도 꽃인데... 김대환 칼럼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4.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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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도 꽃인데...  김대환 칼럼

 

하얀 겨울이 사람들 앞에 조용한 정서를 듬뿍 부어 놓아도 산야의 뭇 생명에겐 겨울의 잔인함은 길고 무서운 것이다. 때가 오면 봄비는 만물을 깨워 생동속으로 몰아 넣으며 계절이 다소 잔인했기 때문에 예수는 부활의 의미를 사랑으로 채우라 했다.
노년의 어른께서 젊은이들의 행태가 너무 나약하고 말이 많아 6·25한국전쟁시 겪었던 고행담을 들려주자 왜 그렇게 굶어가면서 고행했느냐고 되려 반문한다.


먹을 것이 남아도는 세상에 생라면 이라도 먹지요 하는 답변은 당시 정서를 모르는 세대들이라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때로는 현재 기업체의 리더나 행정단위의 수장들이 과거의 힘든 끝에 회생한 성공경험을 절대적 자신의 진리인 양 과신하여 현재의 시각에서 적용하려는 무리수를 가끔씩 보이는 예도 있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모여 기업과 사회를 구하고 역사를 쌓으며 상생과 공존의 틀이 형성된다. 그래서 역사 속의 큰 인물들을 분석해도 공과(功過)는 그렇게 있어 재해석되는 이유다.


원 근에서의 세상사를 귀는 모든 소리를 다 듣고 뇌는 정리한다. 국가의 틀이 민주화의 나무를 심어 새로운 뿌리를 내려 그 나무가 내어 놓는 산소를 취하려 사람들은 갈구하였다.
4·19학생의거가 반 백년을 넘었다. 공부해야 하는 피끊는 대학생들이 죽음으로써 민주화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1960년 4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이루어낸 숭고한 희생이었다.


이에 대한 앙금이 후손과 회원들에 이르기까지 번져 각각의 이유는 동상이몽이다. 역사란 화해와 관용과 사과를 받아들이는 문이 열리며 시작된다. 민주화에 나이가 쌓이고 잔 발이 내리기까지 한 나라안에 같은 동족끼리 총을 쏘며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어두운 과거는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스쳐가는 유행성 독균과 같다. 어쩌면 애완동물이 주인으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거나 유기된 짐승들은 사람들의 동정과 보호의 손길을 거부한다.


다양성의 사회에서 단일민족이란 이름으로 고형화된 역사는 깨어야 한다. 이제는 다민족이 수용할 수 있는 역사의 이름앞에 민족의 정체성을 재정립 할 때가 왔다.
보수와 진보가 긴 시간 줄당기기를 하니까 중도보수, 중도진보가 태생한 것이다. 모두가 국가를 위한 일이지만 너무 길고 심한 역논리는 분열에 가깝다.
근 현대사는 움직이는 역사의 산물이다. 밀실선거, 체육관 선거가 직선제 선거로 숨이 트이면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잔재가 있어도 지속적인 민주화의 확산과 함께 경제성장의 발전은 삶의 질을 높은 반석 위 웰빙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삶의 영위는 죄의 연속일까. 2000년 전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이 땅에 구원자로 온 것이다. 전국의 각 교단과 교회는 예수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찾고 생각하며 부활의 종교 기독교계가 전국적 축이 되어 지역마다 연합예배가 파노라마처럼 얽혀 펼쳐진다.


4월이 다소 잔인하다 해도 거듭난다는 분위기는 새 봄의 서기와 어울려 무척 역동적이다. 꼭 기독교인들만 부활절을 맞아 죄사함과 거듭나는 예수의 영광을 안지말고 내년에는 모든 길 위의 비신자들을 위해서도 자정과 쇄신의 뜻을 담아 기도하는 사순절은 어떨지….
봄꽃들이 난무하는 계절에 눈이 오고 바람이 차가워도 잠시면 봄바람에 이겨 나지를 못한다.
부활절이 지나면 석탄절이 기다리고 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원래의 예수와 석가는 가난했으며 고행이었다.
살찐 교회와 산사의 안팎이 편안해서는 안된다.
벚꽃의 화사함에 밤잠 못 이룸은 살아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허무이다.
‘떨어진 꽃잎도 꽃잎인데 아이야 꽃잎은 쓸어 무엇하려니’란 고시도 한 단락이 이 봄에 더욱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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