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생계형과 묻지마가 동거하는 - 김대환 칼럼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7. 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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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계형과 묻지마가 동거하는 - 김대환

            국민형 가난 정부가 걷을때 국민이 행복에 안착

 

이 시간 어디서인지 삶의 무게와 스트레스에 담보된 자신을 감춘 채 묻지마 관광에 실린 사람들은 그렇게나마 욕망을 분출하려고 덧없음의 시간에 얹혀 떠내려 가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도 불안의 영역이 마음속에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땅의 대학생들. 그래도 열심히 하는 이외의 왕도는 없으므로 오늘도 대학교 도서관은 일찍 만원사례다.
일천만원 등록금의 무거움과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힘겹게 졸업하여 이력서를 100회 이상 제출하여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애국애족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나.


가뜩이나 미래가 불투명한데 여기 맞장구를 쳐주는 격의 사회 안전망 그물의 코는 너무 넓고 아예 찢어진 안전망의 그물을 정치인들은 너무 바빠서 보수할 시간이 없음인지 듣기에도 섬뜩한 ‘묻지마 살인’과 ‘생계형 좀도둑’, 생계형 집단 자살’이 여기 저기서 허술한 사회 안전망의 그물코 사이로 심심찮게 빠져나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쌓여진 사회적 불만의 표출은 옆집 애완견이 좀 시끄럽게 짖는다고 죽이고 고양이를 아래로 던져 죽이고 황구를 처참히 두들겨 패 한쪽 눈이 파열되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중상을 입히는 반사회적성격 소유자가 불만을 표출하는 먹구름이 두꺼운 사회이다.


 

희망은 개인이 만들고 찾아야 하며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과 신뢰의 둑은 국가가 쌓고 키우며 국민형 가난과 청년의 실업은 정부가 걷어낼 때 국민은 국가의 큰 이불을 덥고 행복하게 안착하는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면 사는 길이 있고 살고자 하면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생계형 자살은 마음 약한 젊은이들을 무력감의 정체감 속에서 집단으로 차라리 이 길밖에 없다란 극단의 선택으로 영혼이 병든 엉뚱한 생각과 망각에 사로잡혀 묻지마의 환영(幻影)속으로 빠진다.


옆을 보고 뒤로 봐도 살만한 사람이 있고 노력하는데 너무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인간세상에서 소외감과 극빈으로 연속된 사람들은 오늘도 주변의 무서운 무관심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먼저 칼날을 세우지는 않을런지.
신의 소리를 가진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가 TV에 방영된 황구(진돗개) 학대사건에 대해 충격을 받고 담당경찰서 서장님께 정말 그냥 지나가서는 절대 안된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남다른 정서가 있으니까 신의 소리를 내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되지 않았겠나.

이 시간 대한민국 땅위의 서민층과 무너지는 중산층은 무엇을 생각할까. 또 집권 여당과 중심 야당의 행보는 민생을 위하여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야권의 대표 손학규의 원칙 있는 종북정책론에 대한 정동영 최고위원이 표현에 반론을 재기하며 국민들 앞에서 속보이는 설전은 대표와 최고위원으로서는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지며 김대중과 노무현을 연상시킴의 종북정책론 운운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집권당 한나라당은 애당초 출발부터 한 지붕 밑에 두 집 살림은 위험하다는 평범성의 예측이 깔려도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운명입니다 팔짭니다 하더니 새 얼굴 뽑기에 열을 올리드니 새 얼굴은 친이에서 친박으로 지각이 이동하였다.


야당의 중심인 민주당과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에게 국민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바램이다. 진설성 있는 서민챙기기와 청년실업 구제에 여·야는 함께 에너지를 집중하여야 한다.
생계형 도둑과 생계형 집단 자살, 격리수용과 정신신경과 치료가 필요한 사회 불만자가 칼을 무작위로 흔들어 불특정 다수인이 쓰러지는 비극이 없게 묻지마가 없는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여·야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합집단의 거듭과 여가 야 되고, 야가 여 되는 정치무상속에서 어쨌거나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어도 정치인의 세월은 고장도 멈춰서도 안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데 벽시계처럼은 안되고 말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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