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덧칠하거나 포장하려는 - 김대환 칼럼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7. 2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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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칠하거나 포장하려는 - 김대환

생활.종교 따로 참 종교인도 피해

 

 

당신 뜻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뭔가 개연적게 잘 풀리지 않으면 신(예수, 부처)의 뜻으로 돌려버리는 위험한 세속의 종교인이 있어도 예수님과 부처님께서는 더 큰 미소로 인내할 뿐이다.
신자나 신도수가 많고 예배당이나 사찰의 건물이 외관상 웅장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면 일단 성공한 종교지도자로 더 큰 의자와 검은색 승용차를 탈 자격을 쥐어 주려는 우리 사회는 그렇게 세속의 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신의 내심은 가난 속에서의 기쁨을 갈구하며 나의 기쁨과 성찬은 이웃과 불우한 사람에게 전하라고 했다. 신의 관점은 부자 예배당이나 화려한 사찰 꾸미기는 아니라 했다.
예수님에게 또는 부처님곁으로 한 걸음 더 가깝게 가는 길이 곧 바른 신앙생활이다. 나를 위한 기도보다 자녀 대학합격을 위한 108배보다 먼저 이웃과 더 빈한 가정들에게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예수와 부처는 원했을 것이다.


생활 따로 종교 따로 때문에 진솔한 종교인이 애를 먹고 있으며 2개의 잣대로 매끄럽게 빠져 나가는 개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위에 종교의 이름을 덧칠하거나 포장하려는 어리석음 때문에 참 종교의 심오한 철학이 엷어지고 훼손하는 볼성 사나운 설실이 있다.
판단의 자유는 엄청난 부대효과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가 있다. 바램은 꿈과 연결되는가 하면 바램을 기도한다. 그리고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아직 때가 덜 되었다 기도가 약하다를 얘기한다.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하여 복 받고 구원받음은 개인의 뜻과 판단이며 종교관의 사적(史的)으로 개인의 감성권 영역이다. 운전이 곧 생활의 실무인 현대인 앞에 아침에 출근하여 퇴근할 때만 운전하는 사람과 운수업에 종사하는 운전을 많이하는 사람의 부류앞에 음주, 과속, 졸음, 신호위반, 차선위반 등등은 개인의 이성에 의한 판단이다.


시쳇말로 밥먹듯 위반해도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차만 보고 열심히 운전하다 신호위반으로 적발되는 아쉬움이나 씁쓸함이 있을 때 있다. 단 한번의 위반인지 단속경찰은 알리가 없으며 오직 그것은 자기의 판단이다. 처음이라 한 번쯤 봐주면 좋겠다고 할 수는 있으나 경찰의 판단으로 스티커는 발부될 것이다.
그렇다. 법 잘 지키는 사람도 실수할 때가 있다. 이름 앞에 붙는 직책이나 계급은 인간에게 한없는 매력이 있고 직책이 생산하는 영향력이라면 아무래도 파워(힘)의 본능이 아닐까.


사정기관 4인(국정원장, 검찰청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중 한 사람인 김준규 검찰총장이 법무부에 사표를 제출했는데 이유는 검경수사권조정 합의안이 국회에서 파기된데 대한 총수로서의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4인의 인사권자는 대통령이다. 마침 이 시간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지원활동 중에 있었다. 물론 대통령이 움직이면 청와대도 같이 움직이니까 현지에서 보고를 당연히 받는다. 마음이 편할리 없을 것이다.

당신의 판단이 현명하다 해도 나는 지금 국익을 위하여 이역 만리에서 땀 흘리고 있는데 사표내는 일이 그렇게도 바쁘냐며 서운했을 것이다.
평양감사는 조선시대 최고의 감사자리였다. 평양엔 조선의 내노라 하는 기녀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란 시쳇말의 예사로움이 있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부재중인 데 사표를 낸 것과 평양감사도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를 같은 맥락으로 볼 것인가. 개인의 판단이니까 표현의 자유일까.
성경책 끼고 염주알 들어도 얄팍하고 건성의 신앙으로는 신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될 수 밖에 없다.
판단은 개인이 하는 것이라 해도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의 영역안에서 사람들끼리 공유가 되어야 이성적이거나 감성적 판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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