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천 시

명사탐방 - 삼호물산 조강호 회장, 소년가장으로 수많은 어려움 딛고 일어나

영천시민신문기자 2012. 1. 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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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탐방 - 삼호물산 조강호 회장

                         소년가장으로 어려움 딛고 일어나

 

삼호물산(주) 조강호 회장은 어릴 때부터 소년가장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1976년 삼호물산(주)을 설립했다. 1985년 삼호어묵, 삼호맛살이라는 기존 어묵과는 차원이 다른 상품을 출시하면서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수산물 유통. 가공. 수출업을 선도하는 기업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기업경영 외에도 냉동물제조 수산업협동조합 이사장, 한국농산물유통가공협회 회장, 원양어업개발협회 회장을 맡아 농수산물 유통구조개선에 획기적인 기여한 공로로 상공부장관 표창, 철탑산업훈장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 한소경제인협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민간차원의 대소 경제교류증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조강호 회장은 1982년 재경영천향우회 발족, 재경 출향인사들이 설립한 이수장학회에도 거금을 기탁하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화산농공산업단지 및 도남농공산업단지를 유치하는데도 앞장서기도 했을 뿐아니라, 계열사인 옹가네(대경식품) 공장을 화산농공단지에 입주시키는 등 뜨거운 고향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기업인이다. 조강호 회장을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 파란만장한 삶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조강호 회장과 대화 나누는 서울 본부 기자들


- 젊은 시절을 보낸 영천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저는 영천에서 태어났으나 12살 무렵 영천으로 다시 귀향하기까지는 공산당 치하의 철원에서 자라 어린 시절 영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6·25동란 중 귀향하자마자 선친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나이에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힘들게 주경야독하는 생활을 하다가 18세에 더 큰 꿈을 안고 상경했습니다.”

- 1976년 국내굴지의 수산물 유통 및 가공,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삼호물산(주)을 창업하셨는데요. 창업하기까지 많은 난관을 극복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얘기를 좀?
“18세에 상경하여 영등포시장에서 명태장사부터 시작했지요. 지금 생각해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억척스럽게 뛰었던 것 같았습니다. 워낙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어 지금도 건어물도매시장으로 유명한 중부시장에서 건어물도매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영천출신다운 악바리근성을 발휘하여 통행금지해제 사이렌 소리와 동시에 생선위탁장에 1등으로 도착했지요. 집에서 위탁장까지 1시간도 더 걸렸지만 항상 내가 1등이었지요.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니까 사업을 확장할 기회가 오더군요. 고려원양에서 전국총판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고려원양이 원양에서 잡아온 명태를 국내시장에 팔기위해 시장조사를 하던 중 가장 신용 있고 장사 잘하는 도매상으로 인정한 것이지요. 그렇게 억척같이 뛰다보니 자본이 축적되었고 삼호물산(주)을 설립하여 부산에 생선가공공장을 짓는 한편 국내 원양생선 유통시장을 거의 석권하다시피하게 된 거지요.”

- 1985년 국내 최초로 개발된 원양명태살을 주원료로 하는 삼호어묵이 지금도 소비자들이 즐겨 찾는 1등 브랜드입니다. 개발당시의 얘기를 좀 부탁드립니다.
“향우회가 창립됐던 해 1982년에 당시 수산개발공사에서 경매로 나왔던 원양선박 여러척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5500t급 태백호 선내에 국내최초로 연육가공라인을 설치하여 어묵의 원료인 가공된 연육을 일본에 수출했지요. 그러던 중 일본의 어묵공장을 견학하게 되었고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생산공정, 위생, 품질, 유통과정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에게도 이제는 이런 수준의 어묵을 먹게 해야겠다! 우리 연육으로 우리 어묵을 만들자!’그래서 일본의 유명 어묵회사와 기술을 제휴하여 마침내 시장통의 가마솥에서 튀겨내던 기존 어묵에서 탈피하여 한차원 높은 지금의 1등어묵 삼호어묵을 출시하게 된 것입니다.”

- 원양어업계의 숙원사업이던 감천만의 원양선전용부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셨고 한국농산물유통가공협회 회장, 한소경제인협회 수석부회장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故) 정주영회장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던데요.
“88올림픽때죠. 전경련 주도로 기업들이 올림픽지원사업에 적극 참여하게 됐는데 삼호물산이 수산업대표로 선수들의 식사지원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정주영 회장을 단단장으로 한 경제인 소련방문단에 참가했는데 정주영회장이 저보고 제일 젊으니까 총간사역을 맡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12일 동안의 소련방문 기간 동안 매일 새벽5시면 정주영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전략회의를 했었고 소련측과의 회의 시 제가 브리핑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제가 한소경제인협회 수석부회장을 하기도 했지요.”

- 사업에 매진하시면서도 우리 고향 영천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향우회 활동과 발전방향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린 나이때부터 엄청 고생하면서 자란 고향이지만 제 마음속에서 고향 영천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1982년 존경하는 최석암 선생님을 초대회장으로 하는 재경영천향우회를 창립할 때도 향우회의 재정적 초석을 다지기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화산농공산업단지와 도남농공산업단지를 유치하는데 재경향우회의 많은 선후배들과 힘을 합치기도 했으며 화산농공단지에 계열사인 옹가네 공장을 입주시키기도 했지요. 그리고 전 경기대총장이었던 김한주 박사, 서동권 전 안기부장, 이병후 전 대법관 등이 발기한 이수장학회에도 적극 참여하여 고향의 인재들을 육성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고향발전을 위해서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인 영천에 기업을 유치하여 산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향우회의 활동과 발전방향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고향 영천 출신의 기업인 중에서도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향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지금은 기업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제가 만든 브랜드 상품들이 여전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우리 회사에서 성장한 인재들이 사회 곳곳에서 왕성한 기업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기업인은 자기가 출시한 제품, 자기가 육성한 인재의 가치를 높이고 동종업계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기업인이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대담후 재경영천향우회 최옥희 간사(맨 좌), 최동필 서울본부기자,

                                              조 회장, 윤벽희 서울본부기자,  전한태 재경영천향우회 부회장(맨 우)


-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가장 큰 배경인 가족얘기도 좀 해 주시지요?
“처와 1남4녀를 두었습니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 동안 엄청난 고생을 저와 함께 하면서도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을 잘 다스려준 집사람이 제일 고맙고 저의 가장 큰 배경이 되어준 것 같습니다. 외아들과 막내사위는 기업인으로 나머지 사위들은 모두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데 둘째사위가 얼마 전에 서울대 의과대학 학장으로 선임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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