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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대구 fc 선수 고향서 유소년 축교실 감독, 최석도 전 선수

영천시민신문기자 2011. 10. 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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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대구fc 선수, 고향서 지도자 됐다

최석도 유소년 축구교실 감독

 

요즘 들어 영천지역 축구인들의 입에 약방의 감초처럼 오르내리는 한 축구선수가 있어 이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지역축구 인이라면 하나같이 이 선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데 이견을 두지 않는다. 지난 5월부터 지역의 축구 새싹을 키우기 위해 유소년 축구교실을 시작한 그 화제의 중심에 바로 최석도(30·영천시 도동 711번지)선수가 있다.


조기축구 게임때 그가 움직이면 아무도 따라 잡지 못한다. 영국의 데이비드 베컴 머리를 한 그가 볼을 드리블 하면 민물 뱀장어를 맨손으로 잡을 수 없듯이 현란한 발재간으로 바람을 갈라놓는다.
그가 이렇게 지역 축구인들의 입에 회자 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려서 축구신동으로 불리던 그가 타 지방으로 축구유학을 떠났고 2004년 한국 K리그 대구FC에 프로축구선수로 입단할 당시 신인연봉 최고금액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었다.

                      어린선수들을 지도하는 최 감독


한때 대구공고 2년시절 학생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브라질에서 열리는 U-17(17세이하)세계대회에 참석하면서 무엇인가 축구계에 큰일을 벌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그가 2006년 겨울, 병역의무 때문에 프로선수 캠프에서 물러났다가 병역의무를 끝낸 지난 4월 프로선수로 복귀하지 않고 돌연 고향에 눌러 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선수로서 몸 상태가 최상인 2006년 말 병역의무를 종료하면 일본리그(JFL) FC MIO에 입단하기로 예약티켓을 쥐고 있던 그가 고향인 영천에 눌러앉게 된 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병역의무 관계로 공익근무 직전 영천중학교 축구교실을 잠깐 운영했었다.

그때 가르칠 때와 본인이 축구를 배울 때와는 달리 또 다른 열정과 희열을 맛보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자신의 가르침대로 흉내를 내고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자 이 일에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선수 생활에서 끌어안아야 할 고통을 피하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는지 혹 저 자신이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미쳐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권유를 뒤로 한 채 결국 2011년 4월 7일 병역의무 만료와 동시 고향에 자리를 깔고 말았다.


영천시 축구협회 남기태 회장은 “최선수는 우리지역 축구인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도 없는 그가 이상의 도를 얻기 위해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참으로 안타깝다.”고 한숨을 쉬었다.
현재 최 선수는 축구협회의 도움으로 영화초등학교 인조잔디구장을 이용해 매주 토요일 오후5시 유소년(유치원~초등3학년)반 18명과 일요일 오후 5시 고학년(초등 4학년~중학교 1학년)반 20명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운영에 턱없이 부족한 실비로 자신의 축구 혼을 담고 있다.


이처럼 최 선수가 어린이 축구교실에 굳은 의지를 보이자 그의 친구인 김성곤(30)씨가 팀장, 그리고 대학생 최용운(23)이 매니저로 합류해 그의 양쪽 날개를 자원봉사로 보조하고 있다. 최 선수의 친구인 김씨는 “그가 어린이 축구교실의 경제적 보조와 시간을 위해 주 5일근무조건의 대구 M법인체에 다니고 있다. 아직 우리사회가 이런 축구인재를 위한 지원 시스템이 없어 안타깝지만 우리도 좋아서 그를 돕는다.”고 그를 지지했다.

한편 최선수가 가장 존경하는 축구인 으로는 지난 8월30일 한국대표팀 주장 박주영이 입단한 영국 프리미어리그 아스날FC의 감독 ‘아르센벵거’이다. 그는 벵거의 다양한 전술과 지도력도 찬양하지만 스스로 가능성 있는 선수를 발굴하고 가르쳐 세계적선수를 만들어내는 인간 창작성을 무엇보다 존경한단다.
“축구 선수는 미쳐야만 가능한 직업입니다. 또한 미쳐도 선수로서의 성공률은 불과 2~3%에 불과하며 중도 하차하거나 지도자의 스타일에 합류하지 못하면 대부분 선수들의 인생은 망하는 꼴에 그치지 않습니다.” 고 말했다.
장지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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